
아침이 되니 시월인데도 공기가 정말 살을 에는 듯 했어요.
영하권의 날씨라 패딩 두 겹을 껴입고 성채 언덕 아래에 있는 환전소로 향했죠.
어제 집주인이 숙박비를 현금만 받는다고 해서, 오늘 아침에 준다 했으니 숙제를 해결 해야 했어요.
다행히 환전소는 일찍 문을 열었고, 얼어붙은 손으로 환전을 마치자마자 급하게 숙소로 돌아와 주인인 ‘댄’에게 메시지를 보냈어요.
9시 반쯤 나타난 그는 현금을 받아들고 여기저기 눈을 굴리더니 “오케이” 한마디 남기고 휙 나가버리더군요.
미묘하게 찜찜하지만… 그래도 숙박비를 해결하니 마음만은 한결 편했어요.

🕍 성채도시의 9개 탑을 따라 산책하기
시기쇼아라는 12세기 독일계 사스인(Saxon)들이 세운 중세 성채 도시예요.
지금도 성채 안에 주민들이 실제로 살고 있는 유럽의 몇 안 되는 ‘살아 있는 중세도시’죠.
드라큘라의 실제 모델인 블라드 체페슈가 태어난 도시라 더 유명해졌고, 1999년에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답니다.
특이한건 영주가 이 중세도시를 만든게 아니라 각 직업별 길드원들이 돈을 내어서 성채를 만들어 형성된 도시에요.
그래서 이 작은 도시에는 9개의 방어탑이 있는데 이름이 참 정겹더군요.
- 로프공의 탑
- 주석공의 탑
- 대장장이의 탑
- 재단사의 탑
이런 식으로 ‘직업 이름 + 탑’ 구조랍니다. 탑규모를 보면 어느 길드가 더 돈이 많은 지 알 수 있죠. ㅎㅎㅎ
대장장이 길드가 제일 돈이 많아 보였어요.
다만 탑 안은 대부분 들어갈 수 없고 외관만 구경할 수 있어요.
“들어가도 딱히 볼 건 없겠다” 싶은 아담한 탑들.
계단을 따라 언덕 위 교회도 들어가보고, 성벽 전망도 보고, 골목 사이를 한참 헤매며 걸었어요.
그런데… 정말 동네가 작았어요.

🛍️ 소소한 쇼핑 & 여유로운 오후
점심 먹고 시장 골목을 돌다 냉장고 자석이랑 겨울 양말을 샀어요.
작은 도시에 와 있으면 이런 귀여운 사소한 쇼핑이 은근히 기분 전환이 되더군요.
.
근데… 사실 참 할 게 없긴 하네요.
시기쇼아라는 중세 감성은 있지만 주변으로 가볼 만한 곳은 대부분 교통편이 거의 없거나 정보가 부족했어요.
집주인인 댄은 렌터카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어요. 루마니아 사람들 미친 놈들 많아서 운전도 드럽게 한다고 욕하더군요.
결국 그냥 숙소에서 뒹굴거리다 나갔다가 하며 시간을 보냈어요.
원래는 이런 시간이 꿀휴식이 되어야 하는데 왠지 모르게 잡생각만 많아지는 하루였죠.
“몸이 피곤해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게 훨씬 정신건강에 낫구나” 싶었어요.

🍜 시장 골목에서 볶음국수 + 조용한 성당 산책
날씨는 좋아서, 물도 살 겸 밖으로 다시 나갔어요.
의외로 성채 바깥쪽 맛집 골목이 더 활기가 있었어요.
중국인 단체관광객이 우르르 몰려오고, 조금 뒤엔 일본인 단체도 보였어요.
이런 작은 도시에도 단체 패키지 관광객이 오더군요.
배가 고파 볶음국수로 점심을 해결했고,

그 후 성삼위일체 정교회 성당으로 갔죠.
화려한 금빛 내부와 장식들에 입이 떡 벌어졌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관광객은 단 한 명도 없었죠.
혼자서 성당을 전세낸 기분이었어요.
혼자 조용히 둘러보고 기도도 잠깐 하고 나왔어요.
산책 삼아 시계탑 쪽으로 올라갔다가 문이 열린 수도원 교회에 들어갔는데 여긴 10레이 입장료를 받더군요.
정작 내부는 별거 없는데…
시타델 안은 돈 받을 수 있는 곳이면 무조건 받는 분위기였어요. 개인이 자리만 잡으면 매표소가 되는 느낌이랄까.
혹시나 시기쇼아라 가시면 시타델 안에 있는 성당 가지마시고 바깥에 있는 성삼위일체 성당 한군데만 들어가세요.

🧠 작은 마을, 작은 풍경, 그리고 너무 많은 생각들
평소엔 정신없이 돌아다니느라 생각할 틈이 없었는데 이런 작은 도시에 와서 시간을 텅 비워두니까 오히려 온갖 생각이 밀려들어왔어요.
몸은 확실히 지쳤는데 머리는 너무 말짱해서 더 혼란스러운 느낌.
여행 후반, 체력도 감정도 소진되는 그 시기 같았어요.
그래도 신기하게도 그렇게 시간을 허투루 보낸 것 같아도 해가 지는 건 한순간이었어요.
작은 마을에서의 느릿하지만 묘하게 꽉 찬 하루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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