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부다페스트를 떠나며, 피로 속의 이른 아침
여행 41일차.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를 떠나 에게르(Eger)로 향하는 날이었습니다.
장기 여행이 막바지에 이르니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습니다.
도시의 야경과 화려한 일정은 좋았지만, 밤마다 이어진 활동이 누적된 피로로 돌아온 듯했습니다.
아침 6시, 억지로 눈을 뜨고 간단히 정리한 뒤 짐을 꾸렸습니다.
숙소 근처 마트에서 사둔 샌드위치와 커피 한잔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역으로 향했습니다.
피곤해서 버스를 탈 엄두도 나지 않아, 결국 볼트(Bolt) 택시를 불렀습니다.
거리는 제법 멀어 보였지만 택시로는 20분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도착한 부다페스트 켈레티역(Budapest Keleti Station)은 의외로 썰렁했습니다.
역사라고 부르기엔 단촐했고, 대합실이라기보다 그냥 플랫폼 바로 옆의 출입구 느낌이었습니다.

앉을 곳도 마땅치 않아 뻘쭘하게 서서 기다리는데, 10시가 조금 지나자 전철 같은 열차 한 대가 플랫폼에 들어왔습니다.
전광판이 ‘Eger’로 바뀌는 순간, 이 열차가 내 목적지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자유석이라 자리 경쟁이 치열할 줄 알았지만, 의외로 넉넉했습니다.
창가에 앉아 천천히 창밖을 바라보니, 끝없는 평야가 펼쳐졌습니다.
‘어쩜 이렇게 산이 하나도 없을까?’
그제야 헝가리의 역사가 떠올랐습니다.
광활한 평야에 터를 잡은 탓에, 이 나라는 오랫동안 합스부르크 왕가와 오스만 제국, 나치, 그리고 소련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다고 합니다.
평야의 아름다움 뒤에는 수많은 침략의 흔적이 남아 있었던 셈이죠.

2. 에게르 도착, 시골역의 소박한 첫인상
두 시간 가까이 달려 도착한 에게르 역은 정말 작은 시골 역이었습니다.
플랫폼에 내리는 순간, “아, 이제 완전히 다른 세상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게르는 헝가리 북부의 작은 도시로, 온천과 와인, 그리고 고요한 분위기로 유명합니다.
대중교통이 불편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아예 역 근처의 숙소를 예약했습니다.
새로 생긴 아파트 형태의 숙소라 내부는 깔끔하고 현대적이었습니다.
점심 무렵이 되어 잠시 쉬었다가 구시가지로 걸어 나갔습니다. 거리는 한산했고, 부다페스트의 번잡함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사람들의 발걸음도, 공기의 흐름도 훨씬 느긋했습니다.

3. 구시가지와 에게르 성, 그리고 짧은 후회
에게르의 중심은 작은 구시가지(Main Square)입니다. 여느 동유럽도시와 다를게 없죠.
외국인은 보이지 않고 주로 헝가리 현지인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 듯 했어요.
광장 주변에는 카페, 성당, 박물관이 모여 있었고, 골목을 따라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여행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일 먼저 간 곳은 사도 성 요한 대성당. 헝가리의 성당들은 하나같이 뭔가 거대하다는 느낌이었어요.

헝가리 대표 와인 하면 토카이 와인 이지만 토카이 까지 가기에는 교통편이 너무 애매해서 에게르로 왔어요.
에게르는 황소의 피 라는 와인으로 유명해서 여기서도 와인 시음 을 할 수 있어요.
원래는 미녀들의 계곡이라는 와이너리 협동 조합으로 가서 시음을 하려 했는데 ,어쩌다보니 시간이 늦어서 오늘은 구시가지에서 와인 시음을 했어요.

구 시가지 광장 옆 골목을 정처 없이 걸었어요.
딱히 목적지가 정해진 건 아니고 와인 시음을 할 만한데가 있나 기웃 거리면서요.


Petreny wine bank 라는 와인 샵에 들어가서 와인 시음을 했어요.
대체로 동유럽의 와인들은 맛이 가볍다는 느낌? 묵직하고 떫은 맛은 아니구요. 그냥 부담없이 마시기 좋았어요.
이집 대표 와인 추천 해달라니 친절하게 자기네 집안 와이너리에서 직접 만든거라고 설명을 하면서 따라주네요.
꾸덕한 치즈랑 마시니 찰떡 궁합이었어요. 내일은 미녀들의 계곡으로 가서 본격적으로 마셔 보려고 합니다.
https://maps.app.goo.gl/eu5aPRNSDkvqy2my9
Petrény Wine Bank · Eger, Dobó István tér 10, 3300 헝가리
★★★★★ · 와인 바
www.google.com

한잔 하고 알딸딸 해서 들른 곳은 에게르 성(Eger Castle)이었습니다.
에게르 성(Eger Castle)은 헝가리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장소입니다.
1541년, 헝가리의 수도 부다가 오스만 제국에 함락되자, 남은 헝가리 군은 북부의 성곽 도시들로 피신했습니다.
그리고 1552년, 오스만 제국의 8만 대군이 에게르 성을 포위했습니다.
이에 맞선 헝가리 수비군은 고작 약 2천 명.
수적으로 압도적인 상황이었지만, 성의 지휘관 이슈트반 도보(ISTVÁN DOBÓ)는 끝까지 항전했습니다.
그는 병사들뿐 아니라 수백 명의 여성과 시민들까지 전투에 참여시켰습니다.
여성들은 끓는 기름과 돌멩이를 던져 적을 막았고, 병사들은 포위망을 버티며 38일 동안 싸웠습니다.
결국 오스만 제국은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후퇴했습니다.
이 승리는 헝가리 전역에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었고, 지금까지도 헝가리인들에게 ‘민족의 영웅담’으로 전해집니다.
성 입구 근처에는 이 전투를 기념하는 이슈트반 도보 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저는 그 앞에 서서 한동안 그들의 싸움을 상상했습니다.
지금은 고요한 언덕 위 성채지만, 한때는 피와 불길이 뒤섞인 처절한 전장이었던 곳이죠.
.
입장권을 끊고 들어갔지만, 솔직히 말해 다소 실망스러웠습니다.
볼거리가 많지 않고, 막아 놓은 구역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현지인들은 티켓 없이도 일부 구간을 자유롭게 지나다녔는데,
저는 순진하게 티켓을 구입했던 셈이죠.

어딜가나 문화해설사는 꼭 있지요.
여기도 헝가리 전통복장을 한 문화해설사가 나왔어요.
에게르 시내를 배경으로 오스만투르크의 침략에서 에게르 군이 어떻게 승리했는지 열심히 설명을 해주었어요.
헝가리어라 무슨말인지 하나도 못알아들어서 슬프지만요. ㅠ.ㅠ

그래도 성 위에서 내려다보는 에게르 시내 풍경은 정말 좋았어요. 여기가 유명한 노을 명소랍니다.
날씨가 흐려서 아쉬웠지만 흐린 하늘 아래의 고요한 마을 풍경도 나름의 운치가 있었습니다.
6. 에게르 여행 팁
- 부다페스트 → 에게르 교통 : 켈레티역 출발 직통열차, 약 2시간 소요
- 에게르 성 입장료 : 성인 2000포린트 내외, 일몰 직전 방문 시 전망 추천
- 미녀들의 계곡 : 도심에서 도보 30분~40분, 각 와이너리에서 시음 가능
- 추천 와인 : 에그리 비카베르(Egri Bikavér), 에게르 전투의 전설이 깃든 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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